'Interesting'에 해당되는 글 192

  1. 2007.08.15 자넷 리
  2. 2007.08.15 그렉다이크
  3. 2007.08.15 구타라기 겐
Interesting/people | Posted by hyena0 2007. 8. 15. 20:42

자넷 리


우연히 '검은 독거미'란 별명을 가진 프로 여자 당구 선수 '자넷 리'에 대한 다큐를 보게 되었다. 이 선수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나는 처음 본 얼굴이었는데도 낯이 익었다.

유창한 영어 구사는 물론, 사람들을 충분히 사로잡을 수 있는 유머감각, 경기에 임할 시를 제외하곤 항상 시원시원하게 웃는 얼굴...경기에서 지더라도 상대 선수에게 농담을 건낼 수 있는 여유 등. 그러니 그녀에게 몸에 이상이 있다는 건 알기 어려울 것이다. 더구나 검은 옷만 입는 이유도 그것을 감추기 위한 것.

자넷 리 선수는 인터뷰하면서도 눈물을 비추지 않았다. 정말 강한 여자이다.이웃 어린이에게 노래를 불러줄 때는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천진난만하기도 하다.

자넷 리 선수에게 의사가 "당구를 그만 두어야 하지 않겠느냐?"
"나에게 있어 당구는 선택이 아니다. 내가 존재하는 이유다."

또 있다.
"많은 재능이 있는데 왜 한 가지에만 그렇게 꾸준히 할 수 있는지..?"
"그게 바로 한국인의 특성인 것 같아요. 제가 아는 한국 사람들은 전부 자기가 맡은 일에 끈기를 가지고 최선을 다하죠."

 정말 멋진 사람이다.

 아래 자넷 리 선수의 프로필과 경력 등을 올려보았다.

1970년생
뉴욕 부룩클린 출생
175.3㎝/54.5kg
브롱스과학고 졸업(1989)

닉네임 : Black Widow (검은 독거미)

선천성 척추측곡 (척추가 옆으로 휘는 병) 을 앓고 있다. 척추뼈를 고정시키기 위해 교정장치(볼트장치) 를 하고있다.
1993년 프로데뷔 세계랭킹 8위
1994-1995년 세계랭킹 1위
1996~1998세계랭킹 2위
1998년 WPBA (세계여자프로선수협회) 올해의 선수상 수상
1999년 세계랭킹 3위
2000년 노던라이트9-Ball 우승
2001년 BCA 9-Ball 챔피언쉽 우승 (2위 카렌 코어)
2001년 제6회 아키타 월드게임 금메달 (2위 카렌 코어)

2002년 Cuetec Cues Players Championship (5위)
2002년 Bruswick Billiards Spring Classic (2위)
2002년 BCA Open (4위)
2002년 Bruswick Billiards Midwest Classic (9위)
2002년 Bruswick Billiards U.S. Open (5위)
2002년 Cuetec Cues Fall Classic (9위)
2002년 Cuetec Cues National Championship (9위)
2003년 Tournament of Champions (1위)
WPBA 2003년 기준 (2004년 업데이트가 안된상태) 세계랭킹 4위

사용자 삽입 이미지

Interesting/people | Posted by hyena0 2007. 8. 15. 20:25

그렉다이크


 오늘 아침 사내 TOEIC 를 치르기 위해 준비하던 중...TV에서 특별 좌담이 펼쳐졌는데...
그렉 다이크, 전 BBC 사장이 나와서 언론의 공익성을 말하면서 언론이 중심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말하였다. 이라크전 발발 당시 블레어 정부에서 제시한 대량살상무기에 대한 보고서인 '허튼 보고서'의 잘못을 지적보도하여, 법정으로 가게 되었고 결론은 정부쪽의 편을 들게면서 그렉 다이크는 BBC를 사임하게 된다.

 그러나 몇년뒤 법정은 보고서의 잘못으로 판결을 번복하고 그렉 다이크는 명예회복을 하게 된다...오늘 아침에 방송된 내용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더라....개인적으로 이라크 파병을 찬성했고, 블레어 정부를 신뢰하였지만, 언론의 입장에서는 잘못된 보고서를 가지고 파병을 주도하는 정부를 신뢰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그리고 거짓된 정보와 잘못된 내용을 알면서도 언급하지 않는 미국의 언론을 비판하였다. 당시에 영국정부 및 미국정부로 부터 압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그리고 사장을 사임하면서 그 밑에 있던 사람에게 부담을 주게 되어 미안했다고 한다...정부라는 거대한 집단에 대항해 국민들에게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언론의 책임감을 가지고 반대입장을 표명했다는 것에 대해 존경스럽게 생각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Interesting/people | Posted by hyena0 2007. 8. 15. 20:20

구타라기 겐

플레이스테이션의 아버지 구타라기 겐
소니의 ‘이단아’에서 그룹 최연소 사장이 되기까지
이종천 뉴스위크 한국판 기자 (jclee@joongang.co.kr)  

 
지금 이들은 안방 공략을 위해 어떤 교두보들을 준비하고 있는 것일까. 마이크로소프트의 .NET 전략과 PC를 TV와 스테레오에 무선으로 연결하려는 eHome 프로젝트, 미국 NBC와 AOL의 쌍방향 서비스가 이런 것들이다. 소프트웨어 업체는 소프트웨어를 하드웨어 업체는 하드웨어를, 자신이 가장 잘 하는 것을 앞세워 다양한 전략을 펼치고 있다. 오늘의 포커스는 이 중에서 좀 색다르게 접근하는 소니(Sony)의 전략과 인물에 맞춰 보려고 한다. 소니가 안방공략작전의 최전선에 내세운 것은 엉뚱하게도 플레이스테이션(PlayStation)이라는 게임기이기 때문이다.

1984년 가을 소니 입사 9년차의 말단 연구원 구타라기 겐(久多良木健)은 모니터를 보다 깜짝 놀랐다. 컴퓨터로 만든 얼굴 이미지가 자신의 지시에 따라 커졌다 작아졌다 하고 또 자유롭게 스크린 위를 옮겨 다니는 것이었다. 소니 정보처리연구센터가 방송용으로 개발한 따끈따끈한 신기술 ‘시스템 G’가 구현하는 놀라운 성과가 화면 위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이 기술은 이미지를 실시간으로 조작할 수 있는, 당시로는 혁명적인 컴퓨터 그래픽 시스템이었다.
“바로 이것이다.”

구타라기 겐은 쾌재를 불렀다. 그에게는 목표가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직업으로써 나에게 매일매일 기쁨을 줄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하는 자문과 함께 선택한 길이 전자-컴퓨터공학 엔지니어였다. 그리고 그 일에서 기쁨을 얻으려면 지식과 기술력을 높이는 게 먼저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엔지니어를 넘어 더 큰 야망이 있었다. 소니에서 보통 연 100억 엔의 매출을 올리는 비즈니스는 성공한 것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그는 소니의 미래를 책임질 수 있는 새 수입원으로 보통 성공의 규모를 넘어선 아주 큰 사업을 일으키겠다는, 평사원으로서는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당돌한 꿈을 갖고 있었다. 대규모 비즈니스에 대한 꿈은 어려서부터 조그만 인쇄소를 하는 아버지의 일을 도우면서 키워온 것이었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바로 자신의 사업을 할 수도 있었지만 소규모로 출발해서는 단시간에 자신이 생각하는 성공을 거두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에 인력과 자원이 풍부한 대기업에서 자신의 꿈을 펼치기로 한다. 구타라기 겐이 소니를 선택한 이유다.


80년대초 TV 중심 새로운 엔터테인먼트 예견

무엇을 이루겠다는 각오와 열정이 있는 사람에게는 기회가 알아서 찾아오는 것일까. 구타라기와 ‘시스템 G’라는 신기술의 만남은 우연이라기보다 어떤 운명적인 힘 같은 것이 느껴진다.
구타라기는 소위 말하는 문제사원이었다. 회사에 싫은 소리를 하게 될 때 늘 선봉에 나서서 회사측의 입장에서 보면 블랙리스트로 분류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1980년대 중반 아날로그 기술이 득세할 때 개념조차 생소한 디지털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만 봐도 그의 뚝심을 알 수 있다. 당시 소니 엔지니어의 상층부는 아날로그 기술자들이 차지하고 디지털 기술자들은 맨 아래쪽 귀퉁이에서 잘 보이지도 않을 때였다.

그러나 구타라기는 아날로그 기술에 비해 신호처리가 자유로운 디지털 기술의 잠재력을 일찍부터 간파하고 있었다. 더 이상 늦기 전에 소니는 디지털 기술 개발에 힘을 쏟아야 하며, 컴퓨터 시장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모두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당시 소니에서 디지털 기술이 사용되는 제품은 CD플레이어뿐이었는데 시장에서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소니 사람들은 여전히 뿌리 깊은 아날로그 전통에 얽매여 있었다. 디지털을 외치고 다니는 구타라기에게 한 선배는 이렇게 충고하기까지 한다.
“소니에서는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러다전출당할 수도 있어.”

선배의 경고가 적중했는지는 몰라도 그는 여러 개발부서를 전전하다 마지막 피난처로 정보처리연구센터를 선택한다. 소니 내에서는 드물게 디지털 기술을 연구하던 곳이었다. 엔지니어로서 기술력을 쌓는 것이 그의 목표였기 때문에 자원해서 그곳으로 갔다. 그리고 바로 거기서 3D 컴퓨터 그래픽 기술인 ‘시스템 G’와 만나게 되는 것이다.그는 ‘시스템 G’에서 대박의 가능성을 읽었다. 당시 구타라기는 닌텐도의 게임기 ‘페미콤’(Family+Computer)의 재미에 빠져 있었는데 인기 있는 ‘슈퍼 마리오’나 ‘드래곤 퀘스트’는 모두 2차원 게임이었다. 게임산업은 2D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시스템 G’가 3D게임으로 가는 길을 열어 줄 것 같았다. 그가 꿈꾸던 대규모 사업의 실현이 좀 더 가까워진 것 같았다.

그러나 게임산업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많았다. 그 중에서 가장 큰 장애는 게임을 장난감 정도로만 여기던 소니 사람들의 인식이었다.
“나는 게임기가 미래 가정의 가장 중요한 엔터테인먼트 도구가 될 것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러나 소니 사람들은 아무도 내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게임기를 장난감 정도로만 여겼고, 천하의 소니가 만들 물건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또 대부분의 엔지니어들은 게임기에 사용되는 기술은 하급이라고 아래로 깔고 봤다. 낡은 틀에 갇혀 있는 사람들을 설득하기가 힘들었다.” (Reiji Asakura의 ‘소니의 혁명가들’(Revolutionaries at Sony)중에서)


닌텐도의 배신으로 탄생한 플레이스테이션

내부의 변화를 위해서는 외부의 도움이 필요했다. 구타라기는 게임산업으로 들어가기 위한 내부의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당시 게임업계 최강자인 닌텐도의 명성을 이용하기로 했다. 1989년 우여곡절 끝에 닌텐도의 페미콤에 소니의 기술인 CD를 결합하는 ‘플레이스테이션 프로젝트’를 출범시키는 데 성공한다.
1991년 4월의 어느날 아침, 구타라기는 신칸센을 타기 위해 도쿄(東京)역으로 갔다. 교토(京都)의 닌텐도 본사에 가서 시카고 전자쇼에 출품할 페미콤의 업그레이드 버전인 ‘슈퍼 페미콤’에 관해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그동안 소니는 닌텐도와 함께 처음으로 CD-ROM을 사용하는 게임기를 개발해 이제 그 결실을 목전에 둔 상태였다. 그러나 도쿄역에는 홍보담당 책임자인 노부유키 이데이(出井伸之-現CEO)가 기다리고 있었다.

“닌텐도가 우리와의 계약을 깨고 필립스와 손잡았어.”
닌텐도는 그동안 소니와 같이 일하면서도 내심 소니가 게임기 개발의 주도권을 잡는다면 게임시장을 통째로 내주게 될지도 모른다는 염려를 하고 있었다. 막판에 필립스로 마음을 바꾼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배신이 뜻하지 않은 결과를 낳았다.
닌텐도와의 계약이 깨지자 소니 내부에서는 구타라기에 대한 비난과 함께 게임산업에 발을 들여놓은 데 대한 비판도 높아져 갔다. 많은 사람들이 다시 그의 계획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그들에게 구타라기는 소니의 핵심인 아날로그 사업의 근간을 뒤흔드는 위험인물이었다. 그러나 구타라기는 이제야말로 소니가 독자적으로 CD-ROM 게임기를 개발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낸다.

‘게임산업은 지금 전환점에 놓여 있다. 닌텐도의 선두 자리는 흔들리고 있다. 닌텐도가 더 이상 소니의 파트너가 될 수 없음이 분명해진 이상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야 한다.’
구타라기는 한때 닌텐도의 배신으로 화가 나고 흔들리기도 했지만 꿈은 변하지 않았다.
1992년 6월24일 소니 경영진회의, 심판의 날이었다. 게임기 프로젝트의 운명은 이 회의 결과에 달려 있었다. 그러나 상황은 구타라기에게 희망적이지 못했다. 대다수 사람들이 이 계약 파기 사건을 계기로 소니가 게임시장에서 발을 빼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가 노리오(大賀典雄) 사장이 구타라기에게 우리가 왜 게임기 개발을 계속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라고 지시했다.

“우리 개발팀은 그동안 닌텐도와 공동작업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비밀리에 3D 컴퓨터 그래픽을 이용한 새로운 포맷을 개발해 왔습니다. 이 기술을 이용하면 닌텐도가 감히 따라올 수 없는 게임기를 만들 수 있습니다.”
이어 그렇지 않아도 자신이 사인한 계약을 파기한 닌텐도에 대해 화가 나 있던 오가 사장의 분노심에 불을 질렀다.
“닌텐도가 우리에게 한 일을 가만히 앉아서 당하기만 할 생각입니까. 결단을 내려 주십시오.”
오가 사장이 주먹으로 책상을 쾅 치면서 소리쳤다.
“추진해!”(Do it!)

이날 회의에서 구타라기는 어려운 상황을 반전시키는 데 성공한다. 오가 사장의 결단으로 플레이스테이션 프로젝트는 다시 살아났다. 닌텐도의 배신이 구타라기에게 바로 3D 게임으로 가도록 촉발시킨 계기가 됐으니, 소니의 진입을 막으려던 닌텐도로서는 오히려 악수를 둔 셈이 돼버렸다.
플레이스테이션의 출발점은 바로 3D 컴퓨터 그래픽 기술인 시스템 G였다. 당시로서는 이미지를 실시간으로 조작할 수 있는 유일한 기술이었다. 이 시스템의 비밀은 10개의 프로세서에 의한 데이터 병렬처리에 있었다. 그때까지 병렬처리 기술은 이론적으로만 가능했지 실제로 응용된 사례는 없었다.


오가 회장의 결단으로 탄생한 플레이스테이션 신화

마침내 1994년 12월 출시된 플레이스테이션은 실감나는 화면으로 게임 애호가들을 매혹시키면서 7,000만대 이상 팔렸다. 구타라기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1999년 PS보다 데이터 처리 능력을 700~800배 더 높이고 DVD-ROM을 장착한 PS2를 내놓았다. 1년에 1,800만대가 팔려 나가면서 장난감 정도로만 여기던 게임기가 이제는 소니 전체 수익의 절반 이상을 벌어들이는 대표상품이 되었다.
회사 내의 문제아였던 구타라기는 소니그룹의 플레이스테이션 전담 자회사인 소니컴퓨터엔터테인먼트 CEO로 화려한 비상을 했다.

대규모 사업을 일으키겠다던 그의 꿈은 이뤄진 것 같으나 그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구타라기는 지금 PS2보다 처리능력을 무려 1,000배나 더 높인 신개념의 게임기 PS3를 2005년에 선보인다는 야심찬 계획을 진행하고 있다. 이 새 기계의 막강한 힘의 비밀은 내장될 셀 컴퓨팅 칩(cell-computing chip) 에 숨어 있다고 한다. IBM-도시바와 연합전선을 구축해 개발하고 있는 이 새로운 개념의 칩은 컴퓨팅의 분산처리를 가능하게 한다. 광대역 인터넷으로 연결돼 있는 PS3들은 파워가 더 필요하면 다른 PS3로부터 빌려올 수도 있다.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들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앞으로 게이머들은 컨트롤러나 마우스 대신 웹캠 앞에서 손짓으로 게임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특기할 사항은 PS3에 막강한 하드드라이브가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인터넷에서 다운로드 받은 음악을 1만2,800시간 분량까지, 영화는 2,000시간 분량까지 저장할 수 있다. 가정에서 PS3를 엔터테인먼트의 센터가 되게 한다는 것이 이 프로젝트의 핵심이지만, 의미심장한 것은 컴퓨터까지 대체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는 점이다. 플레이스테이션의 경쟁 상대는 이제 게임기만이 아니라 PC까지 확대될 것이다. TV와 연결된 플레이스테이션이 안방에서 PC까지 몰아내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이 프로젝트가 알려진 후 컴퓨터업체들이 촉각을 곤두 세우고 있다.

물론 소니가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동안 다른 회사들이 손을 놓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지난해 내놓은 하드드라이브를 내장한 게임기 X박스는 사실 PS2보다 PC에 더 근접해 있다. 또 소니 연합전선이 칩을 개발하는 동안 마이크로소프트도 제휴업체인 인텔·Nvidia와 함께 대응방안을 마련할 것이다. 안방 주도권을 놓고 벌이는 게임에서 누가 승자가 될지는 좀 더 시간이 지나야 할 것 같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